이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엠티였지만, 정신적으로 지쳐 있던 나에게는 사소한 치유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짐을 안고 다소 이른 비행기에 올랐다. 우중충한 구름을 삼키며 날아오른 비행기는 태양이 따가워지기 전에 우리를 대한민국의 마지막 낙원, 제주도의 소금기 머금은 땅 위에 내려주었다.
학회라든지, 발표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방문해 본 제주도지만, 올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이 곳에서의 첫날은 우도를 위해서 보냈다. 쓸데없이 길었던 왕복버스라든지, 레파토리가 뻔한 배의 물살 가르는 소리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우도의 풍경에 대한 기억보다도 오히려 선명한 건 단지 시간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과하게 아름다웠던 것일까, 아니면 이걸로도 부족했던 것일까.
조금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들어가 다음날 등산을 위해 일찍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역시나 집보다도 푹신한 침대나 에어콘의 조금은 답답하지만 기분좋은 서늘함조차, 최근 계속된 불면증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두 시간. 그래도 예상보다 많이 잔 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조금은 이 따뜻한 남국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등산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단지 한라산은 내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고, 내 기대 이상만큼 힘들었다는 것 뿐. 되밟은 가시투성이의 기억을 진흙 묻은 운동화로 내디딜 때마다, 그 이상의 반탄력이 가슴을 휘감고 터지는 한숨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힘들었던 마지막 2킬로미터 코스라든지, 중간에 날아가버린 밑창이라든지, 기암괴석과 용암계곡 같은 것들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보다도 등산에서 더 특별했던 건, 처음으로 오랫동안, 일부러 잊기 위해 무언가에 열중할 필요 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던 것이랄까.
두번째 날은 정말로 오랜만에 푹 잤다. 전날, 아니 어쩌면 지난 일주일간 부족했던 잠을 모두 자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잤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바닷가 산책을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일정이 끝났다.
연구실 엠티라는 목적으로서, 후배들을 챙겨야 할 입장이라는 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해 본다. 같이 모여서 풍경을 즐기고 사진을 찍거나, 혹은 그동안의 고민거리를 들어주거나 하기에는 스스로의 감정이 너무 바빴다는 변명을 해보더라도 그것이 잘못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되찾지 못한 어디론가 사라진 소중한 감정처럼 결국 난 아쉬움과 미안함을 남쪽의 천국에 두고 와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