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미 홍익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
몇 년 전 미국 대학에서 ‘케빈 베이컨의 6단계(Six degrees of Kevin Bacon)’라는 게임이 유행했다. 배우의 이름이 주어지면 공동으로 출연한 영화를 연쇄적으로 말해 6번 이내에 케빈 베이컨과 연결시키는 게임이다.
케빈 베이컨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1단계가 된다. 다른 배우를 한 명 거쳐서 연결되면 2단계가 되는데, 로버트 레드포드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과 함께 주연을 맡았고, 메릴 스트립은 케빈 베이컨과 ‘리버 와일드’에 함께 출현했으므로, 로버트 레드포드는 케빈 베이컨과 2단계가 된다.
이 게임을 해보면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배우들은 3단계 이내에 케빈 베이컨과 연결되고, 그 평균은 2.92단계라고 한다. 케빈 베이컨의 이름이 혹시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JFK’, ‘어퓨 굿맨’, ‘유브 갓 메일’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얼굴을 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케빈 베이컨은 많은 영화에 출연한 헐리웃의 마당발이기 때문에 이런 게임의 주인공으로 적당한 배우이다.
그런데 이런 연결망은 배우들 뿐 아니라 수학자들 사이에도 있다. 헝가리 태생의 폴 에르도쉬(Paul Erdos, 1913~1996)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왕성한 연구를 통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수학의 대가이다.
에르도쉬가 워낙 다양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공동 논문을 작성하다 보니, 에르도쉬와 공저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에르도쉬 수(Erdos Number)’라는 것이 있다.
그와 직접 공동 논문을 작성한 사람의 에르도쉬 수는 1이고, 그와 공동 논문을 쓴 사람과 공동으로 논문을 쓰면 에르도쉬 수는 2가 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에르도쉬 수는 2이고, 하이젠베르크의 에르도쉬 수는 4이다.
오클랜드 대학의 수학자 제롤드 그로스만은 처음에 재미 삼아 에르도쉬 수를 도입했다가 현재는 에르도쉬 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감독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에르도쉬 수가 1인 학자는 509명이고, 에르도쉬 수가 2인 학자는 6,984명으로, 이 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늘어난다.
노벨상의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 의학상 분야의 수상자 중 에르도쉬 수가 8 이하인 사람이 상당수이다. 에르도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학자들이 여러 분야의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에르도쉬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수학이 여러 학문 분야와 광범위하게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에르도쉬 수가 1인 사람이 워낙 많아지다 보니 더 세분화하기도 한다. 에르도쉬와 1편의 논문만 썼다면 에르도쉬 수가 그대로 1이지만 그와 공저인 논문이 10편이라면 에르도쉬 수는 1/10이 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에르도쉬 수가 0에 가까워질수록 그와 공동 연구를 활발하게 한 것이다.
케빈 베이컨이나 에르도쉬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는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다. 그래프라 하면 보통 통계를 나타내는 그래프나 어떤 변화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함수의 그래프를 생각하겠지만, 여기서의 그래프는 점과 그 점을 끝점으로 하는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을 말한다.
수학에는 이런 그래프를 연구하는 그래프이론(graph theory)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다양한 학문 분야에 활용된다. 독일의 물리학자 키르히호프는 그래프이론을 전기회로 이론에 적용했고, 그 외에도 그래프이론은 교통공학, 통신공학, 경영학, 컴퓨터 프로그램 등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래프이론에 대한 연구는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Euler)에 의해 제기된 쾨니히스베르그의 다리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쾨니히스베르그는 도시를 관통하는 강에 의해 A, B, C, D 네 지역으로 나뉜다.
이 지역들을 잇는 7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같은 다리를 두 번 건너지 않고, 모든 다리를 건널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다리 건너기 문제는 연필을 떼지 않고 한 번에 모양을 그리는 ‘한 붓 그리기’ 문제로 귀결된다.
한 점에 연결된 선의 개수가 홀수인 경우를 ‘홀수점’이라고 하는데,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하려면 홀수점이 없거나 두개여야 磯? 그런데 쾨니히스베르그 다리에서 네 개의 점 A, B, C, D는 모두 홀수점이기 때문에 한붓 그리기가 불가능하다.
홀수점이 없으면 어느 점에서 시작하더라도 모든 선을 다 지나 그 점으로 돌아오는 ‘오일러 회로(Euler circuit)’가 된다. 또 홀수점이 2개인 경우에는 하나의 홀수점에서 시작하여 모든 선을 다 돌고 다른 홀수점에서 끝나게 된다. 따라서 다음 두 그래프는 醍?한 붓 그리기가 가능하다. 한 번 한 붓 그리기를 시도해 보시길.
협찬 : 한국과학문화재단